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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을`인줄 알았던 평범한 나도…누군가에겐 `진상`

dooitsurvey 2018. 7. 16. 10:11

일상에 파고든 갑질…품격이 무너진 사회

"야, 내가 타준 건데 맛이 없어? 빨리 마셔. 십, 구, 팔, 칠, 육, 오…옳지, 잘한다."

섭씨 95도 뜨거운 물이 커피믹스와 섞인 직후였다.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서울 한 대형 약국. 10초 만에 뜨거운 커피를 원샷하라는 약사의 성화에 이 약국에 정보기술(IT)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 하도급 업체 직원은 혓바닥 화상을 감수하기로 했다. 울화통이 터진 직원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연을 폭로할까 고민도 했지만 "유명인이 아니어서 타격을 줄 수 없다"는 지인들의 말에 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유명 제약회사 한 직원은 매일경제와 만나 "'비가 온다' 등 온갖 이유로 밤에 학원에서 귀가하는 자신들 자녀를 차량으로 태워 달라고 제약회사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대학병원 의사도 상당수"라며 "의료계 갑을관계는 촘촘한 먹이사슬로 일상화돼 있고 일선 약국 직원들도 때론 갑으로 돌변한다"고 전했다. 

우리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퍼진 갑질문화가 대한민국의 품격을 갉아먹고 있다. 정치적 세력가나 재벌 오너가가 자행하는 전통적이고 일방향적인 갑질에 여론의 분노가 집중되는 동안 신분과 계층을 가리지 않는 갑남을녀들에 의해 이뤄지는 일상 속 갑질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다. 

피부 트러블이 생겼다며 백화점 화장품 매장 직원에게 막말을 퍼붓고 폭행한 한 40대 여성고객이 최근 여론의 도마에 올라 일상 속 갑질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공인이 아니라서 비난의 사각지대에 놓여 온 일상 속 갑질의 곪은 상처는 전염에 전염을 거듭하고 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경제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기회만 있으면 너나없이 갑질을 하려고 하는 성숙하지 못한 시민성이 계속되면서 사회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갑질은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소소한 일상에서 활개 친다. 여론조사기관 두잇서베이가 지난 4월 30일부터 열흘간 남녀 3511명을 대상으로 갑질에 대한 인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95%는 자신을 을 또는 병 이하로 여기고 있었다. 대부분 갑질 피해가 국민 대부분이 얽혀 있는 직장상사와 동료, 거래처, 제품 서비스 이용자와 공급자 관계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추가 설문조사 결과와 배치된다. 1064명에 달하는 갑질 피해 경험자와 174명에 불과한 갑질 가해 경험자 간 숫자 괴리는 우리 스스로가 유독 자기 자신의 갑질에만 무뎌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 VIP 고객은 왕, 별 볼 일 없는 고객은 乙

파는 자(종업원)를 향한 사는 자(고객)의 갑질이 그동안 주목받았지만 갑질은 때론 역주행한다. 직원도 고객에게 갑질할 수 있다는 얘기다. 부존빈비(富尊貧卑)라는 차별적 갑질 프레임이 자리 잡은 대표적인 영역은 금융권이다. 

증권사 지점 창구 직원 A씨는 "수수료가 왜 이렇게 비싸냐"는 고객들의 반복되는 으름장에 "싫으면 옮기시라"고 말한다. A씨는 "결국 '사은품을 달라'는 얘기인 줄 뻔히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젖줄 역할을 해야 할 은행도 갑질의 온상이다. 

중소기업에서 재무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한 차장급 직원은 "충분히 담보까지 제공하고 시설·운전자금으로 십수억 원을 은행에서 빌리면서 은행 직원 1년치 연봉을 이자로 주는데 여신승인 부서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붙이면서 전 임직원 카드 발급, 방카슈랑스 가입을 우회적으로 강요한다"고 토로했다. 

이 직원은 "개인고객이면 금융당국의 '꺾기' 금지에 따라 신고라도 하겠지만 여신심사 은행원의 '심기'에 명운이 좌우되는 기업들은 입도 뻥끗 못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고객은 왕이지만 왕에도 등급이 있다는 얘기다. 수백억 원을 굴리는 VIP고객이나 대기업이 고객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1000만원을 맡긴 고객과 100억원을 맡긴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기업 생리이지만, 손님 입장에선 자격지심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기업의 '갑질'이다. A씨는 "회사(지점) 수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소수 고액 자산가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집중적으로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주력 계열사 압박에 군소 계열사는 丙·丁 신세…귀농하니 마을 이장도 몽니

한 배를 탄 조직원끼리도 갑질은 예외가 아니다. 대형 금융그룹 IT 자회사에 근무하는 B씨의 주적은 같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은행이나 카드사 직원들이다. 은행이나 카드사 직원들이 자신들의 실적을 위해 상품 개발에 열을 올리면서 자신에게 경쟁적으로 갑질을 일삼기 때문이다. 

B씨는 "은행과 카드사·증권사 직원들이 인사철을 앞두고 한꺼번에 쪼아대면서 주 52시간 시대에도 연장근로를 밥 먹듯이 한다"고 토로했다. 상품 판매 초기에 전산에 문제라도 생기면 밤을 새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B씨는 "우리 회사 하도급을 받는 중소 IT기업 직원들은 덩달아 같은 신세로 야근을 해야 하고 갑질을 떠넘겨받는다"며 "결국 그들에게는 나도 볼썽사나운 갑으로 비칠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금융사 상품 개발 부문에서 일하는 차장급 직원 C씨는 회사 마케팅 비용을 총괄하는 경영관리 부문 대리 D씨에게 정기적으로 상품권을 상납한다. 신상품 론칭을 위해서는 마케팅 비용이 필수적인데, 칼자루를 D씨 부서에서 쥐고 있기 때문이다. 상품의 법적 타당성을 따지는 준법감시부 직원들도 접대 대상이다. C씨는 "친하지 않으면 문구 하나하나를 갖고 따져서 아예 상품 승인이 안 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계급사회가 있는 조직생활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갑질은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은퇴 후 고향인 경기도 외곽 가족 소유 땅에 전원주택을 지으면서 막바지 귀향 준비에 한창이던 E씨는 얼마 전 청천벽력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전원주택 예정지 앞에 마을 쓰레기장이 지어지고 있었던 것. "마을에 기여한 게 없으니 (귀향하려면) 발전기금 1000만원을 내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한 게 화근이었다.

노는 땅을 사들여 태양광발전 사업을 하는 F씨는 지난해 초만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통이 치민다. 시세가 3.3㎡당 6만원에 불과한 땅을 9만원에 사라는 땅 주인 요구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토지 매입 계약을 하고 주민설명회 등을 거쳐 지자체 인허가 신청에 나섰지만, 일에 진척이 없었다. 인근 땅을 사려고 했는데 F씨 때문에 땅값이 뛰어올라 부아가 치민 마을 이장이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수천만 원을 들여 땅을 사놓고 사업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 없었던 F씨는 이장보다 실력자인 마을 원로를 찾아갔다. 마을잔치에 주기적으로 정성을 보이겠다는 F씨 확답을 받은 마을 원로는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해줬다. 이후 다른 용지를 물색할 때 F씨는 동네 실력자부터 찾는다. 

[이용건 기자 /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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